.소설이든 영화든 단편만이 줄 수 있는 재미로 가장 먼저 꼽힐 만한 것은 군더더기를 가지쳐버린 '농축의 묘'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두더지와 요정>에 담긴 짧은 이야기는 별다른 진전도 없고 급작스런 반전이나 어떤 폭발도 예비하지 않는, 이름 붙인다면 '평면적인' 이야기이다. 허탈해 보일 수도 있는, 표층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단순한 이야기, 그것이 신비로움과 불가해함의 느낌을 빚어낸다. 환상적이고 양식화된 비주얼과 그 속에 잠겨들게 하듯이 몽환적인 트립합 풍의 사운드가 그런 미묘한 매력을 배가한다.
바다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때론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남자가 있다. 그는 방 꼭대기에 높이 달린 창을 통해 한 여자를 보고 있다. 빨간 옷을 입은 고혹적인 미녀가 금붕어가 든 어항을 갖고 거리를 걸어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여자를 유혹하고픈 생각에 그녀를 자기 집에 데려와 식사를 같이 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두더지란 동물은 땅 속으로부터 나왔을 땐 눈뜬 장님이과 마찬가지랬는데, 이게 힌트가 되긴 할까? 남자 주인공 후앙 마르케즈는 연극배우 출신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비롯해 수 편의 스페인 영화에 출연한 바 있고, 여배우 바네사 로렌조는 <엘르> <마리 클레르> <보그>와 같은 유명 잡지들의 커버를 장식했던 스페인의 톱 모델이다.
(1999년 제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홍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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